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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강제규
출연 : 한석규(유중원 역), 최민식(박무영 역), 송강호(이장길 역), 김윤진(이명현 역), 윤주상(고정석 역)
요약정보 : 드라마, 액션 | 한국 | 123 분 | 개봉 1999-02-13 |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작 ‘쉬리’


‘내 인생의 영화.’
...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 인생의 영화라……. 글쎄……. 내 인생에는 어떤 영화가 있는 거지??’

솔직히 한 번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질 않았다.
영화를 많이 사랑하고 한주도 영화를 보지 않고 그냥 넘어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내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였는지에 대해 깊이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부분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의아한 부분이다.
어째든 이러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볼수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인 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보았던 한국 영화 ‘엄마없는 하늘 아래…….’(이 영화를 아시려나?)부터 시작해서 가장 최근에 본 헐리웃 SF ‘게이머’까지…….
물론 모든 영화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많은 영화들이 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된다.
참 어렵다.
선 듯 답을 말하기가 너무 힘이 든다.
이것은 고등학교 때 그렇게 풀기 싫어했던 수학 문제보다도...
어린 조카가 아기의 탄생에 대해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을 때보다도...
중화요리 집에서 자장면과 짬뽕사이에서 갈등 할 때보다 더 어려운 문제다.


그러던 중에 떠오르는 하나의 영화가 있었다.
1999년 2월, 어느 예언자가 지구의 종말이라고 지목했던 그해, 홀연듯 개봉되어 멈추지 않는 흥행을 하며 6백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던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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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는 그때까지의 한국영화에 대한 모든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만 해도 ‘서편제’의 100만 관객동원에 놀라워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 일이었는데 한국에서 한 편의 영화를 5백만이 넘는 사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쉬리’가 증명해 주었다.
또한 그때로써는 최대 규모의 제작비인 25억 상당의 돈을 쓰면서 한국영화의 스케일에 변화를 일으켰다. (물론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큰 제작비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10년 전의 이야기 이다.)
소재에 있어서도 조심스럽기만 했던 남북문제를 이전의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다루면서 그 한계를 한층 더 끌어 올렸었다.
무엇보다 ‘쉬리’가 한국영화에서 이룬 성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나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 이다.
그때에도 간간히 한국영화를 보곤 했지만 그래도 주로 사게 되는 영화 티켓은 홍콩이나 헐리웃의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80년대 초반.) 성룡의 '프로젝트 A'를 보고서는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어 친구들과 영화 속의 장면을 흉내 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줄기차게 성룡이 주연한 영화를 관람했었다.
혹 놓치기라도 한다면 바로 비디오 가게를 찾아갔었다.(요즘 같으면 DVD가게를 가겠지만…….)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홍콩 느와르가 한국 극장가를 점령했었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등을 앞세운 홍콩의 총격전은 그 화력이 결코 식지 않을 것만 같아 보였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지금 생각해도 설레는 영화들이다.)

9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홍콩영화는 강세를 보였고 거기에 헐리웃의 SF 블록버스터까지 밀려들면서 관객들의 눈높이는 높아만 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열악한 한국영화의 선택은 여배우들의 야한 노출을 광고했던 멜로물이나(거의 에로에 가까운…….) 혹은 뛰어난 한 배우의 코믹연기를 앞세운 코미디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상업성을 배제한 예술 영화든가...
해마다 간간히 재미있고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가 한두 편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홍콩과 헐리웃의 거대한 바람 앞에서는 많이 힘겨워 보였다.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얻어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장군의 아들’ 이나 ‘투캅스’와 같은 영화도 있었고(실제 두 영화를 재밌게 봤었다.) 앞서 언급한 ‘서편제’(1993년 개봉)는 한국영화의 관객 동원 100만 시대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 
한 편의 영화로써는 성공 했을지 모르지만 그 영화로 인해 한국영화 산업 전반에 어떤 변화를 줬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영화는 여전히 홍콩과 헐리웃의 그것에 힘겨워하며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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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상황에서 ‘쉬리’가 90년대의 영화적 사고를 종식이라도 하는 듯 놀라운 모습으로 개봉이 되었었다.
나에게 있어서 ‘쉬리’는 참으로 놀라운 영화였다.
‘쉬리’는 그전까지 제작되었던 한국영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들은 여러 편의 헐리웃 영화를 짜깁기 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면서 표절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하던데, 이것은 ‘쉬리’가 철저하게 헐리웃 상업 영화의 공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리’는 헐리웃 상업 영화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한국의 특별한 현실과 사회적 상황을 잘 표현하였다.
선과 악의 구도에서 선이 승리하면 모든 것이 해피엔딩처럼 끝나버리는 헐리웃 영화와는 다르게 ‘쉬리’의 마지막은 어느 누구도 승리자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저 민족의 단절이 아픔으로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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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의 상영 이후 한국영화 산업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영화인들 스스로의 인식도 바뀌게 된 것 같고 그로인해 규모면에서나 투자에서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보여 진다.
무엇보다 영화 소재가 다양해지면서 많은 볼거리가 생산되어졌다.

또한 ‘쉬리’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영화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를 신뢰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더불어 극장의 매표소 앞에서 용기 있게 한국영화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쉬리 의 시작이 바로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박용우, 황정민, 김수로, 김윤진…….
지금 같아서는 어느 영화제에서나 함께 볼 수 있을 것 같은 출연진이다.
이들은 ‘쉬리’를 통해 주연, 조연, 단역 할 것 없이 모두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고 그로인해 한국 배우들에 대한 신뢰 역시 깊어져갔다.

‘쉬리’의 이야기를 하면서...나는 마치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늘 꺼내 읽은 이 이야기는 예전의 설래임을 한 번 더 느끼게 해 주었다.

한국영화 그 가능성의 시작 ‘쉬리’.
오늘은 오래간 만에 ‘쉬리’의 DVD를 보며 옛 추억에 젖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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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전문사이트 '무비조이'로 부터 '내 인생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부탁받고 필자가 작성한 글입니다.

'무비조이' 측에서 수정, 편집하여 개제했으므로 '무비조이' 사이트에 있는 글과는 조금 차이가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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